한국근현대 미술 여류 거장, 박래현에 관하여
'김기창의 아내'라는 수식어 뒤에 가려진 박래현의 1960년대 수묵추상을 다시 읽는다. 앞으로 한국 미술 시장이 주목할 한국근현대 미술의 여류 거장 박래현
박래현, 김기창의 아내 그리고 전시장의 이단
박래현(혹은 과거에는 '박내현'으로 표기하기도 했던)의 이름 앞에는 오랫동안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바로 '김기창의 아내'다. 두 사람이 함께 부부전을 열면 평단은 김기창의 작품을 먼저 논했고 박래현의 작품은 그 뒤를 따랐다. 1950년대 박래현이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하던 시절에도 그 수식어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수식어가 설명이 아니라 가림막이 됐다. 한국근현대 미술의 역사 속에서 박래현이라는 이름의 홀로 서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박래현을 김기창의 아내로 기억할지라도, 동시대 비평가들은 흥미롭게도 박래현의 작품을 그 자체로 생각보다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1962년 김기창과의 제6회 부부전에서 박래현은 이 전시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완전히 지운 색채 덩어리만으로 구성된 추상 작품들을 대거 출품했다. 당시 평론가 이구열은 이 작품들을 가리켜 "완전한 추상 공간과 구조를 갖춘 전시장의 이단과 같은 작품"이라고 썼다. 이단. 찬사인지 경계인지 알 수 없는 말이지만 박래현의 작품들이 당대의 문법을 벗어나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정확히 포착한 표현일 것이다.
이 시리즈는 그 '이단'의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한국근현대 미술과 미술 시장을 오래 지켜본 사람으로서 나는 박래현의 작품이 지금보다 훨씬 더 주목받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박서보에서 이우환으로, 그리고 이배로 그 다음으로 박래현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 믿는다.
1960년대 화단이 선택한 언어 앵포르멜과 박래현은 달랐다
1960년대 한국 화단은 분주했다. 서양에서 건너온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의 물결이 동양화단까지 밀려들던 시절이었다. 묵림회를 중심으로 서세옥 민경갑 정탁영 같은 작가들이 수묵으로 앵포르멜을 실험하고 있었고 한국 미술계 전반에 전위적인 기운이 돌았다. 박래현도 이 흐름 안에 있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구상에서 벗어나 추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고 1962년 부부전에서 마침내 완전한 추상의 세계로 진입했다.
그러나 박래현의 1960년대 수묵추상은 지금까지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다. 1950년대 큐비즘의 영향을 받은 채색수묵화나 1960년대 중후반 이후 활발히 제작된 맷방석 시리즈에 비해 이 시기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낯설다. 한국근현대 미술사에서 박래현이 처음으로 완전한 추상을 시도한 바로 그 시기가 박래혀의 여정 중 가장 덜 주목 받은 시기로 남아있는 것이다.
밖으로 터뜨리지 않고 안으로 스미었던 박래현의 수묵추상
박래현의 1960년대 수묵추상을 처음 마주하면 묘한 긴장감이 있다. 강렬한 원색의 색면들이 화면을 압도하는데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색면이 수만 개의 작은 먹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 번의 붓질로 쓸어내린 것이 아니라 점 하나 하나를 찍어 쌓아올린 것이다. 같은 시기 묵림회 작가들이 먹을 흘리고 튀기고 흩뿌리며 우연의 효과를 끌어냈다면 박래현은 정반대의 방향을 택했다. 철저한 계획과 장인적 반복. 그것이 박래현의 언어였다.
이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결정적이다. <작품 6>의 하단을 보면 비슷한 크기의 파란 먹점 세 개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앵포르멜의 핵심이 내면의 충동을 즉흥적으로 표출하는 데 있었다면 박래현의 번짐 효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된 것이었다. 동시대 비평가 김영주가 그의 작품에서 "감춰있는 지성의 빛"을 읽어낸 것은 정확한 관찰이었다.
당시 서구 앵포르멜을 대표하는 작가들은 내면의 불안과 충동을 캔버스 위에 거칠게 쏟아냈다. 불스의 작품에서 보이는 격렬한 선들은 전쟁 후 유럽의 트라우마가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결과물이었다. 장 포트리에는 석고와 물감을 두텁게 쌓아올리며 촉각적인 상처의 흔적을 만들었다. 이들에게 마티에르란 내면을 밖으로 터뜨리는 방식이었다. 박래현은 달랐다. 수묵이 한지 속으로 스며드는 방식을 택했다. 물질을 쌓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안으로 침투하게 했다. 당대 조선일보의 평이 정확했다. 바로 '색감이 내면으로 흡입되는' 마티에르를 구현한 것이다.
밖으로 분출하는 언어와 안으로 침잠하는 언어는 같은 추상이라는 이름 아래 있었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한국근현대 미술사에서 박래현의 수묵추상이 오랫동안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단순 분류되어온 것은 이 차이를 충분히 읽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왜 곧 미술시장은 박래현을 찾게 될까
그렇다면 박래현은 무엇을 향하고 있었는가. 서구 앵포르멜이 전후의 불안을 표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박래현은 동양화의 전통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방향을 택했다. 먹이 한지 속으로 스며드는 발묵의 원리는 수묵화에서 수백 년간 이어온 기법이었다. 박래현은 그것을 추상의 문법 안으로 끌어들였다.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전통처럼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은 박래현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열었다. 제목은 '삼중통역자'. 한국근현대 미술사에서 박래현을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사이를 동시에 통역한 작가로 자리매김한 전시였다. 35년 만에 138점의 작품이 대거 공개됐고 평단은 뒤늦게 그 작업의 밀도에 놀랐다.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 전시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박래현의 작품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의 언어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언어를 읽기 위한 첫 번째 단서는 박래현이 동시대 한국 작가들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보는 데 있다. 같은 시기 묵림회 작가들도 수묵으로 추상을 시도했다. 재료도 같고 시대도 같았다. 그런데 결과물은 전혀 달랐다. 서세옥과 민경갑이 먹을 흘리고 튀기며 화면 밖으로 에너지를 분출했다면 박래현은 무수한 먹점을 꼼꼼히 찍어 색면을 쌓아올렸다. 같은 재료로 이렇게 다른 세계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박래현을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이다.
한국근현대 미술에서 박래현의 1960년대 수묵추상이 지금 다시 읽혀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역사적 재발견의 차원이 아니다. 이 작품들이 가진 언어가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근현대 미술을 들여다보다 보면 충분히 읽히지 못한 채 지나쳐온 이름들이 있다. 박래현은 그중에서도 유독 아쉬운 경우다. 작품이 없어서가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맥락이 오랫동안 다른 이름에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수식어가 걷히고 나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다. 박래현의 1960년대 수묵추상이 바로 그런 자리에 있다.
잉어서 다음 글에서는 같은 시대 같은 화단 안에서 박래현이 어떻게 혼자 다른 방향을 걷고 있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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